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전도의 굴욕 (문단 편집) ==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이라는 뜻.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라고도 칭해진다. 무릎 1번 꿇을 때마다 3번 조아려서 총 9번. 삼전도에서 [[숭덕제]]에게 절하면서 [[고문|머리를 바닥에 마구 찧어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거나, 인조가 머리를 찧는 소리가 단 위의 청 태종에게 제대로 들릴 때까지 절을 계속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 삼궤구고두례가 당시 조선에서 생소한 예법이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식 예법은 오배삼고지례(五拜三叩之禮)이다. 그리고 이 삼궤구고두례를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에 나온 오해에 가깝다. 즉 '3*9=27번 머리통 박치기(...)로 피가 철철 났더라'는 식의 후일담은 사료상의 근거가 없다. 청나라 때 예법을 보면 저렇게 쓸데없이 길고 격하게 27번이나 했다기보단 1번 절하면 3번 머리를 조아리고 하는 것을 3회 반복하는 것 정도가 거의 확실하기 때문.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선통제]])의 등극 장면에서도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을 봐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장수 [[타타라 잉굴다이|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 : 의식 순서를 소리내어 읽는 것)하게 하였다. 상이 삼궤구고두의 예를 행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 기사 일단 '삼궤구고두례'라는 이름의 항복 예를 치른 것은 분명하지만, 청나라의 예절 방식이라 이 때 처음 언급될 정도로 조선에 생소한 방식인데다가, 왕이 겨울에 맨바닥에서 오랑캐에게 절한다는 치욕스러운 장면이라 그런지 '삼궤구고두례를 했다.'는 언급만 있고 그 장면에 대한 서술은 실록에도 실려 있지 않다. 따라서 지금으로선 구체적으로 어떻게 절을 했는지 정확히 확인할 수단이 없다. >예부의 관원이…[[인조|이종]]의 반차(班次)[* 국가 의례에 예모(禮貌)와 위엄을 갖추기 위한 것]에 대해 주청하자, 상이 말씀하시길, "위세로써 그를 떨게 하는 것은 덕(德)으로써 그를 품는 것만 못하다. 조선의 왕은 비록 병세에 몰려서 내귀하였지만, 역시 한 나라의 왕이다." 명을 내려 앞으로 다가와 좌측에 앉도록 했다. 예부의 관원이 의장 바깥으로부터 왕을 안내하여 북측을 향하면서 들어오게 하였고, 단 아래에 이르러 동쪽에 앉아 서쪽을 향하게 하였다. 그다음으로 좌측에는 호쇼이 친왕, 도로이 군왕, 도로이 버이러 등의 순서로 앉았고, [[소현세자|이종의 장자 이왕]]이 버아러의 아래에 앉았다. 우측은 호쇼이 친왕, 도로이 군왕, 도로이 버이러 등의 순서로 앉았고, [[효종(조선)|이종의 차자 이호]]와 [[인평대군|3자 이요]] 역시 버이러의 아래에 앉았다. >---- >《청태종실록》 33권 숭덕 2년 정월 30일 1번째 기사 사람들이 착각하기 쉬운 점으로, 삼궤구고두례가 패자가 승자에게 올리는 의식으로서 청 황제가 조선 왕의 자존심을 확실하게 짓밟는 행위였던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사실 항복 의식 자체로만 봤을때 딱히 치욕스러운 항복 의식은 아니었다. 삼궤구고두례는 어디까지나 청나라에서 평범한 '신하가 황제에게 바치는 예'에 지나지 않았고, 한 나라의 왕으로 대우받은 인조의 석차는 호쇼이 친왕보다 높은 황제 바로 아래였다. 따라서 청나라 측은 명나라를 버리고 "패자면 패자답게 무릎 꿇고 코 박고 빌어"가 아니라 "황제 폐하께서 친히 이곳으로 행차 하셨으니 이제라도 신하의 예를 표해라."라는 정도의 의미였다. 다시 말해, 황제가 직접 왔으니 와서 인사라도 올리라는 퍼포먼스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당하는 조선 입장에서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굴욕이었겠으나 청나라 입장에서는 매일 신하한테 받는 인사도 삼궤구고두례였고 전쟁 영웅이 황제 앞에서 축하받을 때도 하던 예가 삼궤구고두례였다. 즉 그냥 황제를 알현할 때 하는 일반적인 인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 역사에 관심있거나 삼국지 등을 즐겨 읽은 사람이라면 진짜 패자가 치르는 항복 의식을 대강 알것이다. [[초한전쟁]] 당시 진왕 [[영자영|자영]]의 항복 의식이나 [[삼국지]] 중에 [[촉한]]의 후주 [[유선]]의 항복 장면을 보면 나라의 인장을 바침과 아울러 스스로 염을 하고 머리를 풀어헤친 후 관짝을 들고 항복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함벽여츤(銜璧輿櫬; 옥을 입에 물고 관을 등에 지다)이라고 하는데[[http://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13-0571&program_id=PS-2018093955-01-000§ion_code=05&broadcast_complete_yn=N&local_station_code=00|#]] 머리를 풀어헤쳤다는 것은 죄인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관짝을 들었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다. 이게 바로 중국 전통의 진짜 항복 의식이다. 이에 비하면 인조의 항복 의식은 항복 의식이라기보단 번국의 왕이 종주국의 황제를 만날 때 취하는 예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중국 사극에서 봐도 시간 분량상 많이 나오진 않지만 삼궤구고두례는 말 그대로 3번 절하고 9번 조아리는 뜻으로 일단 행위만 본다면 딱히 치욕스러운 것도 아니고 부모에게나 어른에게 하는 예를 단지 몇 번 더 반복할 뿐이므로, 황제 앞에선 황제의 형이나 숙부 같은 왕족들과 세습 친왕이라도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해야 했다. 또한 황태자 앞에서도 손윗 항렬, 백부, 숙부나 형제들이나 종친, 친왕이라 할지라도 삼궤구고두례보단 한 단계 낮은 이궤육고두례(二跪六叩頭禮)의 예를 올려야 했다.[* 여담으로 이 '황태자'에 해당하는 인물은 청나라 시절에는 강희제 시절 37년 동안 재위하다 폐위된 2황자 윤잉이 유일하다.] 즉, 당시 조선 입장에서는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칙서를 반포하거나 연초에 망궐례를 할 때 북경 쪽으로 절하고 고개를 조아리는 예는 계속 해오던 것이었다. 예를 올린 대상이 '''오랑캐'''라서 치욕이지, 삼궤구고두례라는 행위 자체가 비하의 목적으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단 항복 자체는 남한산성으로 도망간 시점에서 이미 신하를 칭하면서 공식적으로 했었다. 거기에 삼궤구고두례 자체도 조선에선 아예 안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성 안에서 제단을 쌓고 황제가 있는 북쪽 방향으로 원격으로 하면 안 되냐고 우겼는데, 이미 황제가 남한산성 바로 앞까지 친히 와있는 시점에서 그딴 억지가 먹힐 리는 없었고 청나라 사신은 조선 측의 이런 제안들을 전부 다 받아넘기면서, 황제까지 왔는데 예를 갖춰 인사할 거면 제대로 황제 앞에서 해야지 뭔 뚱딴지 같은 소리냐며 인조를 황제 코앞까지 끌고 나와서 인사하게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처음부터 "까짓거 뭐 이런 게 대수랴" 하고 그냥 나가서 고분고분해준 게 아니라 이런 저런 이유로 우기면서 수십 일을 발악하다가 결국 논리로도 힘으로도 밀려서 강제로 한 셈이니 더더욱 굴욕으로 여겨지는 것. 만약 이후 청나라가 명나라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조기에 쇠퇴했다면 삼전도의 굴욕이라 불리는 삼궤구고두례 행위가 한국사에서 치욕스러운 '항복 의식'으로 여겨질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예법이 크게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청나라]]와 [[조선]] 간의 군신 관계를 확정 지은 사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청사고나 실록을 보면, 애초에 청나라 측은 병자호란을 일으킬 즈음까지는 "조선은 형제의 나라이다."라고 동등한 동맹의 관계를 추구했던 반면, 조선은 "명나라는 조선의 아버지 국가인데 그런 명나라에게 덤비는 청나라 따위가 형제의 나라일 리가 없다."는 식으로 청나라의 제안을 싸그리 거절하며 "청나라와 그 황제보다는 명나라와 그 황제가 더 높은 직위에 있다" 라고 응수하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청나라 입장에선 나름대로 조선을 동생으로 대접해주려고 했다가 청나라의 황제 지위까지 부정당하는 모멸적인 대답을 들은 셈인데, 이런 점에서 삼궤구고두례로 신하가 천자(황제)에게 바치는 '청나라 고유의 예' 를 취하게 함으로서 군신 관계를 공식화한 것이 의미를 갖는다. 청나라가 명나라가 하던 국책을 바치라고 한 것이나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단, 황제 앞에선 황제의 친형도 친동생도 사적으로나 형제관계였지 공적으론 모두 황제의 '신하'의 위계이며, 정묘호란때 형제의 연을 맺은 것이 병자호란때 신하로 격하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정묘호란 이후 청나라가 몽골을 합병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면서 공적으로 '''"동생인 조선왕은 황제가 된 형 청나라 황제에게 공식적으로 신하의 예를 올려라!"''' 라는 '위계변동'에 적응할 것을 종용한 것에 부합한다. 또한, 이 의식이 끝난 후에는 청나라에서도 연회를 열면서 조선 국왕 인조를 제대로 대접하게 되는데, [[숭덕제]]가 "조선 왕은 일국의 국왕이니 짐의 아우들 사이에 앉히도록 하라." 라고 명령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만주인 고관들이 주로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일들,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도르곤]]과 인조가 서로 나눈 대화 등에서 보면 알 수 있다. 상술한 연호를 따르게 하는 것이나 군신(君臣) 관계의 예우를 명나라에게 하던 시절과 거의 똑같이 한 것은 단지 조선을 신하로 만든 것만이 아닌, 명나라 시절과 같은 군신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청나라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옛날 삼전도비엔 인조가 무릎 꿇고 절하는 동판 부조가 있었는데, 그것은 198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묘사의 모습이 사실과 전혀 맞지 않고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고 하여 이미 철거했다. 2ch 같은 곳이 [[혐한]]의 재료로 노골적으로 써먹는 중. 또 문화재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부조가 당대에 나왔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어 문제가 많다. 헷갈리지 말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